심전도 발명 100년: 현대 심장의학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심전도 발명 100년: 현대 심장의학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진료실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검사
가슴 두근거림, 흉통, 실신, 호흡곤란
어떤 심장 증상으로 병원을 찾으시든, 의사가 가장 먼저 권하는 검사는 거의 항상 같습니다.
가슴과 팔다리에 작은 단자를 붙이고 10초 만에 끝나는 그 검사
심전도(ECG) 입니다.
너무 흔해서 당연하게 느끼실지 모르지만,
이 검사는 현대 심장의학 그 자체의 출발점입니다.
심전도가 없었다면 부정맥, 심근경색, 심부전, 유전성 부정맥
우리가 오늘날 진단하고 치료하는 거의 모든 심장질환의 개념이 지금처럼 정립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시작에는 1924년 노벨상을 받은 한 네덜란드 의사가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빌렘 아인트호벤(Willem Einthoven).
2024년은 그의 노벨상 수상 100주년이었습니다.

심장을 "그림"으로 그린다는 발상
19세기 중반까지 심장은 청진기로 듣거나, 맥박으로 느끼는 대상이었습니다.
의사는 환자의 가슴에 귀를 대고 박동의 리듬을 추측했고,
손목에서 맥을 짚어 빠른지 느린지 판단했습니다.
그런데 19세기 후반, 일부 과학자들이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습니다.
심장이 박동할 때마다 미세한 전류가 흐른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만약 이 전류를 정확히 측정할 수 있다면,
심장의 활동을 눈으로 볼 수 있는 그래프로 바꿀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사실....인간의 심전도를 처음 기록한 사람은 Einthoven이 아니었습니다.
1887년 영국의 Augustus Waller가
Lippmann 모세관 검류계라는 장비로 인류 최초의 인간 심전도를 측정했습니다.
당시 Einthoven은 이 장면을 직접 참관했고,
훗날까지 Waller의 공로를 명확히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Waller의 장비는 신호가 흐릿하고 정확도가 부족했습니다.
임상에서 쓰기에는 한계가 분명했죠.
이 한계를 넘어선 사람이 Einthoven입니다.
끈 하나로 심장을 듣다 — String Galvanometer
Einthoven은 1903년, string galvanometer (현선 검류계) 라는 장치를 발표합니다.
두 자석 사이에 가느다란 은도금 석영 실을 매달아두고,
심장에서 나오는 미세한 전류가 이 실을 흔들면
그 움직임을 광학적으로 확대해 종이에 기록하는 장치였습니다.
말 그대로 "끈 하나로 심장을 듣는" 기계였습니다.

이 장비의 결과물은 그 이전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매우 선명하고, 재현 가능하고, 무엇보다 임상에서 사용 가능한 품질이었습니다.
그런데 검사 과정은 오늘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장비의 무게가 약 270kg 에 달해 한 번 설치하면 옮기기 어려웠고,
환자는 양손과 한쪽 발을 차가운 소금물 통에 담그고 있어야 했으며 (피부와의 전기 접촉을 위해),
검사 한 번에 여러 명이 매달려야 했습니다.
지금 진료실의 작은 심전도기를 생각하면 격세지감입니다.
P, Q, R, S, T — 100년째 변하지 않는 다섯 글자
Einthoven이 남긴 또 하나의 결정적 기여는 심전도 파형에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그는 심장 한 박동에서 나오는 다섯 개의 봉우리에 알파벳 순서대로 P, Q, R, S, T 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1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전 세계 모든 심장내과 의사는
그가 정한 이 다섯 글자 그대로 심장을 읽고 있습니다.
한국이든 미국이든 독일이든,
배우는 심전도 용어는 동일합니다.
하나의 의학 언어가 그렇게 시작된 것입니다.
Einthoven이 1906년 발표한 Le Télécardiogramme 이라는 논문에는
다양한 부정맥의 심전도가 실려 있었는데,
그중에는 인류 최초로 기록된 심방세동(atrial fibrillation) 도 있었습니다.
오늘날 전 세계 5,900만 명이 앓는 가장 흔한 부정맥의 첫 사진을 찍은 것도 Einthoven이었던 셈입니다.
그는 1924년, 심전도 메커니즘 발견의 공로로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합니다
심전도가 열어준 100년의 의학
Einthoven의 발명이 단순히 "심장을 그림으로 그리는 기술"에서 끝났다면
의학은 이렇게 발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가 만든 도구는 이후 심장의학 전 분야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심전도는 이렇게 진화했습니다.
진료실의 작은 표준 12유도 심전도기
환자가 수 일 이상 차고 다니는 웨어러블 심전도 기기
두 손가락만 대면 측정되는 휴대용 1(6)-lead ECG
손목에 차는 스마트워치 (Apple Watch, Samsung Galaxy Watch 등)
피부 밑에 이식되어 수년간 부정맥을 감시하는 이식형 루프 레코더
장비는 한없이 작아지고, 정확도는 높아지고, 환자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장치의 근본 원리는 100년 전 Einthoven이 정한 그대로입니다.
손목 위에서 작동하는 스마트 워치의 ECG 센서 안에는,
어떤 의미에서 100년 전 라이덴 대학의 한 네덜란드 의사가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는 셈입니다.
100년이 지나도 여전히 가장 강력한 검사
의학에는 수많은 첨단 영상기기가 있습니다. CT, MRI, PET, 3D 심초음파
모두 훌륭한 도구입니다.
그러나 가장 빠르고, 가장 저렴하고, 가장 광범위하게 쓰이는 심장 검사는
여전히 100년 전 Einthoven이 만든 것의 후예입니다.
진료실에서 환자분께 "심전도 한번 찍어볼게요" 라고 말할 때,
우리는 사실 100년의 의학사를 한 장의 종이 위에 펼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떠셨나요? 매번 무심코 받았던 그 검사가 사실은 100년의 역사를 가진 발명품이었다는 사실이 조금이라도 새롭게 느껴지셨거나 조금이라도 재미있으셨길 바랍니다.
대표원장 차명진
내과 전문의 / 심장내과 전문의 / 부정맥 중재시술 전문의
서울대병원 순환기내과 (부정맥) / 서울아산병원 심장내과 (부정맥) 교수 역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학사/석사/박사
본 칼럼은 일반적인 건강 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것으로, 개별 환자의 진단이나 치료를 대신하지 않습니다. 증상이 있으시면 진료를 통해 상담받으시기 바랍니다.